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종(조선)/특이한 기록들 (문단 편집) == 건강 문제 == 세종은 [[편식]], [[운동부족]], [[과로]], [[스트레스]], 고된 정사와 같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생활 습관으로 인해 각종 질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특히나 많은 왕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세종의 [[어진]]은 상상화이며, 실제로는 상당한 [[비만]]이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고 세종이 [[운동]]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종의 건강을 걱정한 어의들이 억지로 조금이라도 시켰을 것이며, 세종도 좋아했던 [[스포츠]]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그 스포츠는 조선식 [[골프]]라고 할 수 있는 격방이었다.(...)[* 격방의 규칙은 현대의 골프와 굉장히 유사하다.][* 알다시피 골프는 선수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운동이라기보단 비지니스나 레저에 가까운 스포츠다.] 물론, 세종이 정말로 비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도 없고 어진도 소실되었기 때문에 세종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현대의 해석이 가미된 것이다. 즉위 말년에는 [[당뇨]]에 인한 합병증으로 온갖 통증에 시달렸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나, 해당 통증들은 당뇨가 아닌 [[강직성 척추염]] 때문이란 주장도 있다.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8129/1|#]],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17263#home|#]]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시달렸다는 안구 통증. 당뇨병으로 인한 망막증은 통증이 없으나, 세종은 수 차례 안구 통증을 호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이 강직성 척추염을 앓았기 때문에 운동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여기에 편식 등 안 좋은 식습관과 과로[* 애초에 조선시대 왕의 업무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일만 해야 할 정도로 많다. 조선 왕들의 태반이 40대에 단명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과로이다. 특히나 움직임이 적은 업무는 당뇨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세종의 [[일 중독]] 기질을 보았을 때 특히나 심한 과로에 시달렸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때문에 온갖 질병과 통증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종의 생활 습관을 살펴 보면, 둘 다 앓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세종이 [[고기]] 마니아였던 까닭은 집안 내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씨 집안은 [[여진족|여진]], [[몽골]] 같이 육식을 자주하는 이민족들과 부대끼며 살던 동북면 장군 집안으로 [[태조(조선)|할아버지]]는 [[한반도]] 전역을 넘어 [[요동]]까지 누빈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고, [[정종(조선)|큰아버지]] 역시 할아버지를 따라 일찍이 전장을 누볐으며 사냥과 스포츠를 즐긴 무골로 사냥한 짐승을 태조에게 진상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그나마 집안에서 문관 출신이었던 [[태종(조선)|아버지]]조차도 조선 왕조에 손꼽히는 [[사냥]] 마니아였다. 집안 자체가 부유한 상류층이었는데, 아예 왕족으로 올라선만큼 사가에서 지낼 때부터 자연스럽게 육식과 가까울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조부와 부친, 큰아버지는 격구, 활쏘기, 말타기, 사냥 같은 운동을 즐겨 육류 위주의 식습관을 가져도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세종은 [[독서]]를 매우 좋아했는데, 몸을 움직이기 싫어해서 방에서 들어 앉아 꼼짝도 않는 지금의 비만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수라상에 고기반찬이 없으면, 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어지간히 편식이 심했던 모양이다. 아버지인 태종은 [[정종(조선)|정종]]의 3년 상을 치를 때, 세종이 잠시 고기를 끊는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도[* 주상이 젊었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였는데, 이제 초상을 당하여 소찬(素饌)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내가 어찌 어엿비(가엾게) 보지 않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8월 29일] 한편으로는 아들 걱정이 또 발현되어서 본인이 승하하기 직전 남긴 유언 중에 '주상이 고기를 좋아하니, 내 상을 치를 때는 고기를 먹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선시대에도 고인이 생전에 상주나 유족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라는 유언을 했다면, 예법에 상관없이 그 유언을 따르는 것이 도리였다.] >임금이 허손병(虛損病)을 앓은 지 여러 달이 되매,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서 육찬(肉饌) 자시기를 청하여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듣지 아니하고, 병세는 점점 깊어 약이 효험이 없으니, 유정현 · 이원 · 정탁 등이 육조 당상(六曹堂上)과 대간(臺諫)과 더불어 청하기를, “평인(平人)들이 만사를 제폐(除廢)하고 상제(喪制)를 지켜 행하여도 3년 안에 병에 걸림을 오히려 면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전하(호칭)|전하]]께서 지존(至尊)하신 몸으로 소찬(素饌)만 진어(進御)하시고 만기(萬機)를 보살피시면서 3년의 상제(喪制)를 마치고자 하신다면, 병이 깊어 치료하기 어렵게 되시리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이를 위하여 산 사람을 상해(傷害)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 ‘육즙(肉汁)으로서 구미(口味)를 돕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제 세자(世子)가 어린데, 전하께서 상경(常經)만 굳이 지키어, 병환이 깊어져서 정사(政事)를 보지 못하시게 된다면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의 복이 되지 않습니다. 태종의 유교(遺敎)에도 또한 말씀하시기를, '''"주상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 '권도(權道)'란 '수단은 옳지 않으나 결과로 보아 정도(正道)에 맞는 처리 방도. 목적을 이루기 위한 편의상의 수단'을 뜻한다. 대충 "그 아이는 고기 없이는 밥을 못 먹으니, 내가 죽고 나서도 (장례 기간에 육식은 안 된다고) 너무 따지고 들지 말고 융통성을 발휘해서 장례를 마쳐라"라는 뜻. 숨을 거둘 때조차 아들이 자기 상 치르다가 몸 상할까 염려하는 태종의 자식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이 아들이 왕인지라 몸 상하면 나라가 큰일난다는 점도 있겠지만, 태종은 세간의 호랑이 임금님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지극한 아들바보이기도 했다.]고 하셨으니, 이는 곧 전하께서 예법을 지키시고 지나치게 슬퍼하시므로, 앞으로 건강을 해하실까 미리 아시고 염려하셨사오니, 어찌 위로 조종(祖宗)의 영(靈)을 위로하시고, 아래로 신민(臣民)의 바람에 좇지 아니하십니까.” >---- >세종 4년(1422년) 11월 1일(갑인) 하지만 애초에 이 유언이 알려진 계기가, 세종이 3년상을 치르던 도중 고기를 안 먹어서 [[신하]]들이 건강을 해친다며 올린 [[상소]]에서 인용한 것이어서, 안 먹을 땐 안 먹었다. 물론 아예 밥 자체를 먹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어서 [[영양실조]]로 죽은 [[인종(조선)|인종]]을 제외하면, 3년상 중에 [[임금]]이 고기 안 먹는다고 신하들이 기겁하며 말리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아 까짓거 고기 한번 안 먹는다고 안 죽어요~” 라고 하면 안 되니까 빈말로라도 챙겨드셔야 한다고는 했겠지만 말이다. 이 편식만큼은 고치지를 못해서, 임금이 초가집에서 살고 고기 반찬을 금함으로써 하늘에 속죄해야 하는 [[가뭄]] 때에도 고기 반찬을 거르지 않았다. [[설렁탕]]도 세종이 [[선농단]] [[제사]]를 올릴 때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선농단에 발이 묶이게 되자 배가 고파서 친경[* 親耕. 선농단 제사 행사 중 하나로 왕이 직접 땅을 갈며 [[농사]]를 권장하는 행사였다.]에 쓰인 밭 가는 [[소]]를 보고 그 자리에서 잡아 만든 데서 유래한 [[음식]]이라는 [[야사(역사)|야사]]가 있을 정도. 사실 [[설렁탕]]은 [[몽골]]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음식이지만 여기에는 설렁탕과 같은 형태의 [[요리]] 자체가 몽골의 영향으로 생겨나기는 했으나 설렁탕이라는 이름과 구체적 형태는 선농단에 [[어원]]이 있다는 의견이 있으니, 설렁탕을 무조건 몽골 요리라고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졸곡(卒哭) 뒤에도 오히려 소선(素膳)을 하시어, 성체(聖體)가 파리하고 검게 되어, 여러 신하들이 바라보고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또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시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시는 터인데, 이제 소선(素膳)한 지도 이미 오래되어, 병환이 나실까 염려되나이다.''' '''옛날 [[원경왕후]](元敬王后) 초상에 태종께서 육선(고기반찬)을 권하시면서 이르기를, ‘주상의 한 몸이 종사(宗社)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이니,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셨나이다.''' 신 등의 오늘날 청하는 것도 또한 종사와 생민(生民)을 위하는 것입니다.” >---- >세종 4년(1422년) 9월 21일(을해) >---- >'''"졸곡(발상 후 3달) 후에도 오히려 드시지 않아 몸이 여위시고 검게 된 모습을 보면서 신하들 가운데 뵙고 놀라지 않은 사람들이 없으며 '''또 평소에도 고기 없이는 식사를 하지 못하시는 분인데 드시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 건강이 심히 염려됩니다. 옛적 [[원경왕후]]께서 돌아가신 날 태종께서 고기반찬을 권하시며 말씀하시길 '왕의 몸은 왕조의 평안과 관계되는 일이니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의 청하는 이유 역시 왕조와 백성을 위하는 것입니다.''' >---- >현대어 번역본 그리고 태종이 직접 세종의 건강관리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지만, 몸이 비중하니 가끔 밖에서 놀기도 해야 하므로 사냥을 함께 하면서 무사(武事)를 강습하려 한다."''' >---- >세종 원년 10월 9일 기사. 다만 여기에는, [[왕위]]에서 물러난 후의 생활이 심심하니[* 은퇴하고 나서 할 게 갑자기 없어지니 이해가 안 되는 처사는 아니다. 태종은 상왕치고 권한이 적은 편은 아니었으나 당연히 현역 시절과 비교하면 할 게 없어지는게 당연하다.] 아들 핑계로 사냥을 즐기며 놀러 다니고 싶은 태종의 [[꼼수]]도 있기는 하다. 세종의 이와 같은 고기 사랑은 본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역사]]적인 [[성군]]이 고기만 먹는 편식의 대표주자였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들려서인지, 오늘날에는 세종 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훈민정음]] 다음에 고기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런 세종도 유독 입도 안 댄 고기가 하나 있는데, 바로 [[양고기]]다. 당시 [[조선]]에서는 양고기가 나오지 않아 수입을 해야 했는데, 세종은 수입할 돈으로 더 많은 [[백성]]을 먹여살릴 수 있다며 거부한 것이다. 다만 세종 초기 [[영락제]]가 세종에게 잔치하라고 양과 거위를 하사하는 기록이 있는 걸[* "황제께서 신에게 이르시기를, 중국에 술이나 과일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길이 하도 멀다 하시고, 생견(生絹) 3백 필과 안팎 옷감 30필과 양 1천 마리를 하사하시어, 술과 과일 값으로 하라 하시었으니, 이상의 물건들을 왕이 받으시고, 왕의 나라에 있는 것으로 잔치를 차리게 하시오."하고, 사신이 먼저 태평관으로 돌아가니, 병조 참판 이명덕과 지신사(知申事) 원숙(元肅)을 보내어, 채백(綵帛) 15필, 채견(綵絹) 15필, 생견 3백 필, 양 8마리, 거위 16마리, 《음즐서(陰騭書)》 1천 권을 받아 오게 하였다.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8017_001]]] 보면, 적어도 양고기 맛을 본 적은 있을 가능성은 있다. 세종이 고도 비만까지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이 [[김종서(조선)|김종서]]에게 이런 말을 한다. >"'''30살 전에 매던 띠(帶, 허리띠)가 모두 헐거워졌으니 이것으로 허리 둘레가 줄어진 것을 알겠다.''' 과인의 나이가 33세인데 살쩍의 터럭 두 오리가 갑자기 세었으므로, 곁에 모시는 아이들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뽑고자 하기에, 내가 말리며 말하기를, '병이 많은 탓이니 뽑지 말라.'고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년) 8월 18일. 젊었을 때 매던 허리띠가 헐거워져서 허리둘레가 줄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데다가 살쩍에 흰 터럭이 나 있다고 말하는 장면. 이걸 보면 재위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젊었을 때보다 살이 빠져 버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다만 이 부분은 [[당뇨병]]에 의한 체중 감소로 보기도 하는 편이다. 게다가 [[식욕]]뿐만 아니라 [[성욕]]도 왕성해서 [[후궁]] 포함 7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보았다. [[부부]]간의 금슬도 좋아 그 중 8남 2녀가 정실부인 [[소헌왕후]]와 사이에서 나온 자식으로 조선조에서 2번째로 많은 정실 [[자손]]을 보았다. 문제는 태어난 왕자들도 죄다 아버지를 닮아 능력이 매우 뛰어나 그들에게 국사를 맡기는 바람에 [[문종(조선)|문종]]이 승하한 이후 조선의 정치에 큰 [[계유정난|파란]]을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어린 [[단종(조선)|단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해 줄 대비나 대왕대비가 없었다는 점도 컸다. 대비나 대왕대비, 즉 선왕의 정실부인은 중전 시절부터 내명부를 총괄해야 했으니 정치적 감각이 어느 정도 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중심을 잡아줄 수 있고, 설령 감각이 좀 부족하다고 한들 왕자 출신 종친 입장에서는 법적으로 혹은 실제로 어머니/할머니/형수이기 때문에 대비가 어린 왕을 감싸면 함부로 무시하기 어려웠다.(여담으로 그렇기에 [[인목왕후|반대로 대비가 왕에게 등을 돌리면]], [[인조반정|그건 왕을 갈아치울 명분까지 될 수도 있다]].) 물론 [[숙종(조선)|숙종]]처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수렴청정을 받지 않은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이 쪽도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살아있었던 상황이였기에 4세 아니면 5세 정도에 즉위 했더라도 충분히 수렴청정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세종은 [[임질]]에도 걸렸다. 이 임질이 [[성병]]이냐 아니냐에는 많은 말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실록을 검토한 [[한의사]]들은 성병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한의학]]에서 말하는 임(淋)은 현대 [[의학]] 기준으로는 요로결석, 혈뇨 등을 포함한 배뇨장애의 총칭이며 크게 5가지의 오림(五淋)으로 나뉜다. 육식을 즐기고 비만했던 세종의 기록을 보면 고림(膏淋)[* [[소변]]이 쌀뜨물 같고 기름기가 많아 점성이 높은 상태. 당뇨병의 초기 증상이기도 하다.]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임질의 기록을 찾아봐도 증상이 요도에 발생할 질환에 가깝게 설명되고 심지어 아버지의 그 곳을 빨아 임질을 낫게 했다는 [[효자]] 이야기도 있다. 현대 의학 용어로 굳이 적자면 신경성 방광염일 가능성이 높다. [youtube(cccJhK8aweA)] 아무튼 세종대왕이 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유명해서인지 이런 [[패러디]] 영상도 있었다. 이 영상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SBS)|뿌리깊은 나무]]에서 등장하는 세종대왕 배역을 맡은 [[한석규]]가 나왔다.[[http://tvple.com/humor/478732|#]][* 영상에 쓰인 곡은 [[정형돈|뚱]][[길(가수)|스]]의 [[고칼로리]]다.] [[스펀지(KBS)|스펀지]]에서도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고기가 없다고 반찬투정을 하는 세종의 화면을 내보냈는데, [[이혁재]][* 재미있게도 [[세종(조선)]]과 같은 [[전주 이씨]]다.]가 세종으로 분해 상당히 그럴싸하게 역정을 냈다. 반면 식생활이 검소하기로 유명한 [[영조]]는 패널 중 한 명인 [[홍지호]] 박사가 연기했다. 간장 한 종지를 아껴서 내년에 또 먹는다는 대사로 패널들의 배꼽을 뺐다. 단순한 식습관과 운동 외에 과로 역시 몸을 망친 주범이었다. 세종은 [[수면]] 시간이 상당히 적었다고 할만큼 그만큼 일을 많이 했고 수면 부족과 과로가 이중으로 겹쳐 가뜩이나 젊었을 때부터 안 좋았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킨 것. [[신숙주]]가 밤늦게 책을 보다 잠들어 세종이 덮을 것을 주었다는 일화가 있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 시간까지 왕이 잠도 안 자고 일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아래의 "평생직장"과 함께 생각하면 신하 입장에서는--폭군, 암군보다는 훨씬 낫지만-- 만나고 싶지 않을 [[군주]]라고 할 수 있다. 또 세종은 비만 때문에 심각한 [[시각장애]]와 [[수전증]]을 앓고 있었다. [[http://www.ablenews.co.kr/News/Include/NewsContentInc.aspx?CategoryCode=0033&NewsCode=4437|#]] 세종은 지화에게 종3품을 작록할 때 이미 [[눈병]]을 앓고 있었다. 질병의 원인이 당뇨[* 악명높은 합병증으로 [[망막병증]]이 있다.]라는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신빙성 있는 주장은 아직까지 딱히 없는 상태이다. 눈병을 오래 앓아 눈이 침침하였고, 말년에 가면 [[지팡이]] 없이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실록을 보면 세종 23년 2월에는 “내가 안질을 얻은 지 이제 10년이나 되었으므로 마음을 편히 하여 조섭(調攝)하고자 하니 매월의 대조회와 아일(衙日)의 조참(朝參)과 야인들의 숙배(肅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없애게 할 것이며, 향과 축문도 친히 전하지 말게 하라”, 4월에는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파서 봄부터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은 지팡이가 아니고서는 걷기에 어려웠다. 온천에서 목욕한 뒤에도 효험을 보지 못하였더니, 어젯밤에 이르러서는 한방 약물학 책의 주석(註釋), 작은 글자를 보았는데도 볼 만하였다”고 하였다. 현대의 시각장애 등급으로는 약 4~5등급으로 예상된다. 이 정도의 시각장애는 [[https://m.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m_image&mode=column&sm=mtb_nmr&query=%EC%8B%9C%EB%A0%A5%EA%B2%80%EC%82%AC%ED%91%9C&nso=so%3Ar%2Ca%3Aall%2Cp%3Aall|시력검사표]]에서 제일 윗 [[글자]]를 읽을까 말까 하는 [[시력]]이다. 그래서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아버지 태종이 [[독서]]를 좋아하는 세종의 책들을 한 권도 남김없이 다 수거해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얘기는 아주 유명한 일화.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에도 당뇨와 심각한 눈병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격무에 시달렸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